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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창 의거는 한인애국단에서 어떤 의미를 가졌을까요?

분위기를 표현한 AI 역사 재현 이미지입니다 (사료 아님)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은 한인애국단 단원으로서 도쿄에서 일왕의 행렬을 향해 폭탄을 던졌고, 의거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이후 윤봉길 의거로 이어지며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언제
1932-01-08

왜 중요한 사건일까요

1930년대 초 임시정부는 안팎의 어려움으로 활기를 잃고 있었습니다. 이봉창 의거는 이 상황을 바꾸려는 한인애국단의 첫 활동으로 평가됩니다. 이 글에서는 거사의 배경과 과정, 그리고 이후 독립운동에 남긴 흐름을 차례로 살펴봅니다.

이봉창은 누구였을까요

백과사전에 따르면 이봉창은 1901년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1925년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와 도쿄 등에서 일하며 지냈고, 일본인 양자가 되어 기노시타라는 이름을 쓰기도 했습니다. 1930년 12월 중국 상하이로 갔습니다. 출생 연도는 1900년으로 적은 자료도 있어 자료에 따라 다릅니다.

한인애국단의 출발

당시에는 만보산사건 이후 어려워진 분위기와 내부 혼란을 이겨 내려는 목적이 있었다고 백과사전은 설명합니다. 한인애국단은 1931년 상하이에서 김구를 단장으로 조직된 임시정부 산하의 특무 조직입니다. 1931년 12월 13일 이봉창이 선서를 한 일이 사실상의 출범으로 설명됩니다. 폭탄 준비는 김홍일이 맡았다고 우리역사넷은 전합니다.

1932년 1월 8일 도쿄

이봉창은 1932년 1월 8일 도쿄에서 육군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던 일왕 히로히토의 행렬을 향해 폭탄을 던졌습니다. 폭탄은 일왕이 아닌 궁내대신이 탄 마차 앞쪽에서 터졌고, 거사는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장소는 흔히 사쿠라다몬 앞이라 하지만, 한인애국단 항목은 경시청 앞이라 적고 이봉창 항목은 요요기 연병장이라 적습니다. 장소 표기는 자료에 따라 다릅니다.

결과와 의미

이봉창은 체포되어 1932년 10월 10일 이치가야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습니다. 백과사전은 이 일로 일본의 이누가이 내각이 총사퇴했고, 중국 신문들이 크게 보도했다고 설명합니다. 같은 해 4월 29일에는 윤봉길이 상하이 훙커우공원에서 의거를 일으켰고, 이후 중국 정부의 지원으로 중국 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 안에 한인특별반이 설치되는 등 독립운동의 환경이 달라졌습니다. 윤봉길 의거로는 일본군 고위 인사 등 7명이 죽거나 다쳤고, 이봉창 의거 후 중국과 일본의 관계가 나빠져 일본군이 제1차 상해사변을 일으키는 빌미가 되었다고도 전해집니다. 이봉창은 1946년 서울 효창원에 안장되었고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았습니다.

생각해 볼 질문

1. 목표를 이루지 못한 의거가 왜 역사에서 큰 의미를 갖게 되었을까요? 2. 같은 사건이 자료마다 장소나 날짜가 다르게 적힐 때, 우리는 어떤 태도로 읽어야 할까요?

참고한 자료

아래 공개 자료를 대조해 작성했습니다. 자료마다 서술이 다른 부분은 ‘자료에 따라 다름’으로 표시했습니다. 오류를 발견하시면 오류제보로 알려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