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임시정부는 3·1운동 직후 상하이에서 1919년 4월 10~11일 임시의정원 회의를 거쳐 세워졌고(수립 기념일은 4월 11일), 같은 해 9월 노령·상하이·한성의 임시정부가 통합되었다. 이후 일제의 압박으로 여러 도시를 옮겨 다니다 1940년 9월 충칭에 자리 잡았다.
- 언제
- 1919-04-11
- 어디서
- 상하이
배경
3·1운동 뒤 지도자들 사이의 연락이 어려워 지역별로 임시정부가 따로 세워졌다. 연해주(노령)의 대한국민의회, 상하이의 임시정부, 국내의 한성정부, 만주의 군정부가 그 예다. 한성정부는 13도 대표가 인천 만국공원에서 수립을 결의하고 4월 23일 국민대회로 알렸다.
수립과 통합
1919년 4월 10일 임시의정원이 구성되어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했고, 4월 11일 임시헌장을 반포하며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다만 정식 선포일을 4월 13일로 보는 견해도 있어 과거에는 13일이 기념일이었으며, 2019년부터 기념일이 4월 11일로 바뀌었다. 9월에는 상하이 정부가 한성정부의 법통을 잇고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를 임시의정원에 합치는 방식으로 통합이 이뤄졌다. 통합 날짜는 자료에 따라 다르다. 국가기록원은 9월 11일 통합이라 하고, 대백과는 9월 6일에 임시헌법이 마련되어 이승만을 대통령, 이동휘를 국무총리로 하는 내각이 선출되었다고 쓴다. 우리역사넷은 9월 11일을 제1차 개헌일로 적는다. 또 대한국민의회에서는 이동휘 계열만 통합에 참여했다.
활동과 이동
1919년 7월 국무원령으로 임시연통제를 제정해 도·군·면 단위의 비밀 행정망을 만들었고, 교통국은 상하이와 국내를 잇는 연락을 맡았으나 1922년 말에는 국내 활동이 어려워졌다. 외교 면에서는 김규식이 파리강화회의에서 독립을 주장했고, 미국의 구미위원부는 이승만 중심으로 활동했다. 1932년 윤봉길 의거 뒤 상하이를 떠나 항저우, 1935년 전장, 1937년 말 창사, 1938년 광저우와 류저우, 1939년 치장을 거쳐 1940년 9월 충칭에 정착했다고 대백과는 정리한다.
참고한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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