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과 독립군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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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은 1895년 을미의병부터 1907년 정미의병까지 국내에서 일어난 무장 저항이고, 독립군은 1910년 강제병합 이후 주로 만주·연해주 등 국외에서 활동한 무장 조직이다. 두 흐름은 이어져, 일부 의병이 국외로 옮겨 독립군의 기반이 되었다.

언제
1895
어디서
전국, 만주·연해주

의병

을미의병은 1895년 을미사변(8월 20일)과 11월 단발령에 대한 반발로 일어났으며, 지방의 유력 유생이 지휘부를 이루고 병사는 평민이 많았다. 1905년 을사늑약 전후의 을사의병에서는 최익현 같은 유림 지도자와 신돌석 같은 평민 의병장이 활약했고, 농민이 전투 병력의 주축을 이루었다. 1907년 7월 고종 강제 퇴위와 8월 군대 해산 뒤에는 해산 군인이 합류하며 전투력이 높아졌고(정미의병), 1908년에는 13도창의군이 서울 진공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대백과는 1908년을 의병 활동의 절정으로 보며 연간 약 2,000회, 참가 약 3만 6천여 명이라고 쓴다.

독립군

의병은 일본군의 공격으로 국내 기반을 잃어 가며 간도·연해주로 활동 무대를 넓혔다. 우리역사넷은 1908년부터 연해주 의병이 독립군 형성의 선구가 되었고, 홍범도를 비롯한 함경도 의병이 그대로 독립군으로 전환했다고 설명한다. 대백과는 1909년 남한대토벌과 1910년 병합 이후 많은 의병이 국경을 넘어 중국에서 무장투쟁을 이었다고 쓴다. 또 신민회 계열 인사들이 만주로 망명해 독립군기지를 개척했다.

비교

의병은 유생·농민·해산 군인이 지역에서 일어난 국내 항쟁이었다. 독립군은 병합 이후 국외 기지를 바탕으로 활동했고, 의병 노선을 계승한 독립전쟁이 독립운동 방략의 주류가 되었다고 우리역사넷은 평가한다. 일부 의병이 국외로 이동해 독립군이 되었으므로 두 흐름 사이에는 연속성이 있다.

참고한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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