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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도창의군은 왜 서울로 향했을까?

분위기를 표현한 AI 역사 재현 이미지입니다 (사료 아님)

1907년 군대해산 이후 전국의 의병이 양주에 모여 13도창의군을 결성했고, 1908년 1월 선발대가 서울 가까이 진출했으나 실패하여 의병은 흩어져 항전을 이어갔습니다.

언제
1908

흩어져 싸우던 의병이 하나로 모이다

의병은 대개 지역별로 따로 싸웠습니다. 그런데 정미의병 시기에는 전국 의병이 힘을 합쳐 수도 서울을 되찾으려는 계획이 세워졌습니다. 이것이 13도창의군의 서울진공작전입니다.

1907년, 무슨 일이 있었나

1907년 6월 일제는 헤이그 특사 사건을 구실로 고종을 강제로 물러나게 했고, 정미칠조약으로 통치권 대부분을 장악했습니다. 8월 1일에는 한국군이 강제로 해산되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따르면, 서울에서는 시위대 대대장 박승환의 자결 소식을 들은 해산군인들이 일본군과 시가전을 벌였고, 지방에서도 해산군인들이 의병에 합류했습니다. 이 때문에 의병의 무기와 편제가 한층 정예화되었습니다.

양주에 모인 1만 명

이인영이 전국 의병의 연합을 호소하자 각 도의 의병이 양주 대진소에 모였습니다. 대백과는 모두 48진, 1만여 명이었다고 설명합니다. 이들은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하는 13도창의군을 결성했고, 허위가 군사장을 맡았습니다.

서울 문턱에서 멈추다

1908년 1월 허위는 300여 명의 선발대를 이끌고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나아갔습니다. 하지만 일본군의 선제공격을 받고 후속 부대와의 연락도 끊겨 물러나야 했습니다. 총대장 이인영이 부친상으로 고향에 내려간 일도 작전에 차질을 준 요인으로 전해집니다. 작전이 무산된 뒤 의병은 흩어져 각자 항일전을 이어갔습니다.

이후와 의미

허위는 1908년 6월 11일 체포되어 같은 해 10월 21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했습니다(향년 54세). 일제는 1909년 9월부터 약 2개월간 남한대토벌작전을 벌였고, 의병의 활동 무대는 점차 만주와 연해주로 옮겨 갔습니다. 정미의병에는 유생뿐 아니라 해산군인, 평민 등 여러 계층이 참여했고, 이 경험은 훗날 독립군으로 이어졌다고 평가됩니다.

생각해 볼 질문

1. 서로 다른 지역과 신분의 사람들이 하나의 부대로 모이는 일이 어려웠던 까닭은 무엇일까요? 2. 작전이 실패했는데도 이 일이 역사에서 중요하게 기억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참고한 자료

아래 공개 자료를 대조해 작성했습니다. 자료마다 서술이 다른 부분은 ‘자료에 따라 다름’으로 표시했습니다. 오류를 발견하시면 오류제보로 알려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