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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독립선언은 무엇이고, 3·1운동과 어떤 관계일까요?

분위기를 표현한 AI 역사 재현 이미지입니다 (사료 아님)

2·8독립선언은 1919년 2월 8일 일본 도쿄의 조선 유학생들이 발표한 독립선언으로, 3·1운동보다 앞서 일어나 3·1독립선언서 작성과 운동 확산에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됩니다.

언제
1919-02-08

왜 중요할까요?

3·1운동보다 3주쯤 앞서, 일본 도쿄에서 조선 유학생들이 먼저 독립을 외쳤습니다. 이것이 2·8독립선언입니다. 나라 밖에서 터져 나온 이 선언은 3·1운동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흐름 가운데 하나로 평가됩니다. 독립운동가들이 해외에서 한국의 독립을 알리려 애쓰던 시기에, 일본의 심장부인 도쿄에서 공개적으로 독립을 선언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지금부터 그 과정을 차근차근 살펴보겠습니다.

어떤 배경에서 나왔을까요?

1918년 미국 대통령 윌슨이 내세운 민족자결주의 원칙과,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유학생들은 기회가 왔다고 보았습니다. 1919년 1월 6일 도쿄의 조선기독교청년회관(YMCA)에 모인 유학생들은 행동에 나서기로 뜻을 모았고, 실행위원을 꾸렸습니다. 선언서의 대부분은 이광수가 썼다고 전해집니다. 다만 그는 이미 1월에 중국으로 떠난 상태였습니다.

2월 8일, 무슨 일이 있었나요?

유학생들은 2월 8일 청원서와 선언서를 외국 공관, 일본 정부와 의회, 조선총독부, 신문사 등에 우편으로 보냈습니다. 같은 날 오후 YMCA에서 열린 집회에서 선언이 발표되었는데, 이 집회에는 약 600명이 모였다고 합니다(참석 인원은 자료에 따라 다름). 선언서는 강제 병합을 비판하고, 한국의 독립이 동아시아와 세계의 평화에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결의문에는 병합조약의 폐기, 민족대회 소집 요구, 만국평화회의에 대표 파견, 목적을 이룰 때까지 끝까지 싸우겠다는 다짐이 담겼습니다. 일본 경찰은 이어진 모임을 해산시켰고, 실행위원 10명이 체포되었습니다. 2월 12일과 23일에도 시도가 있었고 그때마다 추가 체포가 이어졌습니다.

결과와 의미는 무엇일까요?

3·1운동이 시작된 뒤 유학생들은 동맹휴학에 나서거나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일본 측 기록에는 2월 8일부터 5월 15일까지 359명이 귀국했고, 그중 127명이 서울로 돌아간 것으로 나옵니다. 3·1독립선언서를 쓴 최남선은 이 선언서를 참고했지만, 온건하게 쓰라는 손병희의 뜻에 따라 무력 투쟁을 떠올리게 하는 표현은 빼거나 누그러뜨렸다고 설명됩니다. 두 선언서가 닮은 점과 다른 점을 비교해 보면 당시 사람들의 고민을 읽을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볼 질문

1. 나라 밖에서 공부하던 유학생들이 가장 먼저 독립선언에 나선 까닭은 무엇이었을까요? 2. 2·8독립선언서와 3·1독립선언서가 투쟁 방식에서 서로 달랐던 이유를 어떻게 생각하나요?

참고한 자료

아래 공개 자료를 대조해 작성했습니다. 자료마다 서술이 다른 부분은 ‘자료에 따라 다름’으로 표시했습니다. 오류를 발견하시면 오류제보로 알려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