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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말살통치와 창씨개명은 어떻게 진행되었나요?

분위기를 표현한 AI 역사 재현 이미지입니다 (사료 아님)

중일전쟁 이후 일제는 황국신민서사, 조선어 교육 배제, 신사참배 강요에 이어 1940년 2월 11일부터 창씨 신고를 시행했습니다. 신고율이 낮자 학교와 배급 등을 이용한 압박이 가해졌습니다.

언제
1940-02-11

이름까지 바꾸라고 한 시대

이름은 나를 나타내는 가장 기본적인 표시입니다. 1940년 조선총독부는 조선 사람들에게 일본식 씨명을 신고하도록 했습니다. 이것이 흔히 창씨개명이라고 부르는 정책입니다. 이 정책은 하나만 따로 떼어 보기보다, 그 앞뒤에 있었던 황민화 정책과 함께 볼 때 이해하기 쉽습니다. 아래에서는 시간 순서대로 그 흐름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황민화 정책의 흐름

우리역사넷에 따르면 1936년 부임한 미나미 지로 총독은 내선일체를 내세웠고, 1937년 중일전쟁 이후 황민화 정책이 빨라졌습니다. 1937년 10월 4일부터 학교와 각종 단체 모임에서 황국신민서사를 낭독하게 했습니다. 1938년 3월 3일 제3차 조선교육령이 만들어지면서 학교에서 조선어 교육이 줄어들어 사실상 배제되기 시작했습니다. 신사참배도 강요되었습니다. 1940년 8월에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강제로 폐간되었습니다.

창씨 신고와 압박

1939년 11월 10일 조선민사령이 개정되었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우리역사넷에 따르면 1940년 2월 11일부터 8월 10일까지가 신고 기간이었습니다. 신고가 없으면 호주의 성을 씨로 삼는 법정창씨가 적용되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신고가 많지 않았습니다. 대백과사전은 1940년 5월 중순에 신고율이 7.6%였다고 적습니다. 그러자 관공서와 단체를 동원한 독려가 이어졌고, 신고하지 않은 가정의 자녀가 학교 입학과 진급에서 제한을 받거나 배급과 민원 처리에서 불이익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법적으로 강제한 것은 아니었다는 주장이 있지만, 위와 같은 압박이 있었다는 점은 자료에서 확인됩니다.

숫자와 저항, 그리고 그 이후

최종 신고율은 자료에 따라 다름입니다. 우리역사넷은 8월 10일 마감 뒤 약 80%라고 쓰고, 대백과사전은 기한이 연장된 1941년 말까지 81.5%(322만 694호)였다고 기록합니다. 신고율만으로 사람들의 뜻을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대백과사전에는 본래의 성을 살려 창씨하거나 풍자하는 이름을 지어 항의한 사례, 처벌을 받은 사례도 소개되어 있습니다. 광복 뒤 이름은 빠르게 회복되었지만, 강제동원 피해자 명부 상당수가 일본식 이름으로 되어 있어 본인 확인에 어려움이 남았다고 합니다.

생각해 볼 질문

1. 신고율이 높았다는 사실만으로 ‘자발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어떤 사실을 더 살펴봐야 할까요? 2. 이름과 말은 한 사람과 공동체에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정책이 학교와 일상 속에서 시행되었다는 점은 무엇을 보여 줄까요?

참고한 자료

아래 공개 자료를 대조해 작성했습니다. 자료마다 서술이 다른 부분은 ‘자료에 따라 다름’으로 표시했습니다. 오류를 발견하시면 오류제보로 알려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