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Unknown author · 1907-07-09 · Public domain (PD US expired) · 출처(Wikimedia Commons)
이상설은 1907년 헤이그 특사의 정사로 파견되었고, 이후 연해주 등지에서 성명회·권업회 등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이어갔습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습니다.
- 언제
- 1870
한눈에 보기
이상설(李相卨)은 1870년 12월 7일(음력) 충청북도 진천에서 태어났고, 몰년은 자료에 따라 다릅니다(공훈전자사료관·인명사전 기재 1917년 4월 1일, 공훈록 본문은 1916년 순국으로 서술). 헤이그 특사의 정사로 파견되었고 이후 연해주 일대에서 독립운동을 이끌었습니다.
생애와 활동
1894년 문과에 급제했고 1896년 성균관 교수 겸 관장에 임명되었습니다. 1904년 일본의 황무지개척권 요구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 후 참찬으로서 조약 파기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고, 11월 30일 종로에서 연설한 뒤 자결을 시도했으나 구원되었다고 공훈록은 적습니다. 1906년 4월 망명해 용정에서 서전서숙을 세웠습니다. 1907년 헤이그 특사의 정사로 이준, 이위종과 함께 활동했고, 8월 9일 궐석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되었습니다. 이후 영국·프랑스·미국을 다니며 외교 활동을 했고, 1910년 성명회 선언서를 작성했으며 1911년 권업회를 조직했습니다. 투병 끝에 연해주 니콜리스크(우수리스크)에서 숨졌습니다.
활동 지역
충북 진천(출생), 서울, 중국 용정(서전서숙)과 상하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페테르부르크·니콜리스크, 네덜란드 헤이그, 영국·프랑스·미국이 기록에서 확인됩니다. 서울현충원에는 위패가 모셔져 있다고 기재되어 있습니다.
기록이 말해 주는 것
공훈전자사료관에는 운동계열 계몽운동,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로 기재되어 있습니다. 공훈록은 유해가 화장되고 저작도 소각되어 공훈에 비해 남은 자료가 거의 없다고 적고 있습니다. 인명사전은 당대 일제 측이 그를 연해주 독립운동의 중심으로 보았고, 동지들도 두뇌로 불렀다고 소개합니다. 다만 같은 사전은 그의 정체론이 왕정 지향에서 크게 벗어났다고 보기 어렵다는 해석도 함께 싣고 있어, 평가에는 입장 차가 있습니다.
관련 사료와 기록
- 이상설 독립유공자 공적정보(공적개요·공훈록) (식별번호 4614) — 공훈전자사료관 상세페이지가 이상설의 생몰년, 대통령장(1962), 헤이그 특사와 연해주 활동을 공훈록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 이상설 – 독립운동인명사전 — 독립운동인명사전 상세페이지가 이상설의 서전서숙·성명회·권업회 등 활동과 1917년 4월 1일 사망 기록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볼 질문
1. 국내를 떠나 망명지에서 교육과 단체 조직에 힘쓴 활동은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요? 2. 몰년이 자료마다 다를 때 기록의 성격(공적조서, 공훈록, 인명사전)을 어떻게 구분해 읽어야 할까요?
참고한 자료
아래 공개 자료를 대조해 작성했습니다. 자료마다 서술이 다른 부분은 ‘자료에 따라 다름’으로 표시했습니다. 오류를 발견하시면 오류제보로 알려 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