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Unknown author (Credit: http://hyunk02.egloos.com/1600612) · Over 70 years · Public domain · 출처(Wikimedia Commons)
천도교 3세 교주로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대표 격으로 1919년 태화관 독립선언식을 주도했다고 공훈록에 기록된 인물입니다.
- 언제
- 1861
한눈에 보기
손병희(孫秉熙)는 공훈전자사료관에 1861년 4월 8일 태어나 1922년 5월 19일 세상을 떠난 것으로 기록된 천도교 지도자입니다. 공훈록은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충청북도 청원 출신이라고 적고, 같은 페이지의 인명사전 항목은 출신지를 충북 청주로 적어 자료 안에서도 표기가 다릅니다. 동학과 천도교를 이끌었고, 1919년 3·1운동 때 독립선언식을 주도한 인물로 서술됩니다.
생애와 활동
1882년 동학에 들어가 1884년 최시형을 만났고, 1894년 동학혁명 때에는 북접 동학혁명군의 통령으로 논산에서 합류했다고 공훈록은 기록합니다. 이후 원산·강계 등지에서 숨어 지냈다고 합니다. 1901년 일본을 거쳐 상해로 망명해 이름을 바꾸었고, 1905년 동학을 천도교로 고치고 3세 교주가 되었습니다. 출판사 보성사를 세우고 보성학교와 동덕학교를 인수해 교육 사업에도 관여했으며, 1908년 박인호에게 교주 자리를 넘기고 우이동에서 수도에 전념했다고 합니다. 1919년 1월 하순 최린·권동진·오세창 등과 독립선언을 협의했고, 3월 1일 오후 2시경 태화관에서 29명이 모인 가운데 선언식 진행을 주도했다고 공훈록은 적습니다. 현장에서 일본 경찰에 구금되었습니다.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이 선고되었고(수형기록 판결일 1920-10-30),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른 뒤 석방되어 서울 상춘원에서 요양하다 병사했다고 기록됩니다.
활동 지역
기록에서 확인되는 지역은 충청북도(출신지 표기), 논산·호남·호서 일대(1894년 동학혁명), 원산·강계(은신), 일본과 상해(1901년 망명), 서울(우이동, 태화관, 서대문형무소, 상춘원)입니다.
기록이 말해 주는 것
공훈록은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고 밝히고, 운동계열은 3·1운동으로 분류합니다.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1992년 3월과 2019년 3월에 선정된 기록이 있고, 묘소는 서울 수유 국가관리묘역으로 안내됩니다. 다만 공훈록은 서훈 근거를 정리한 공적 서술이어서, 독립선언 방식이나 장소 선택에 대한 학계의 다양한 평가까지 담고 있지는 않습니다. 기록이 직접 적은 사실과 후대의 해석은 구분해서 읽어야 합니다.
관련 사료와 기록
- 독립유공자 공훈록 손병희 (식별번호 2821) — 공훈전자사료관의 손병희 공적정보 페이지로, 생몰일, 3·1운동 관련 활동, 수형기록과 1962년 서훈 내용이 정리되어 있습니다.
생각해 볼 질문
1. 공훈록은 독립선언 장소를 탑골공원에서 태화관으로 바꾼 경위를 적고 있습니다. 이 결정을 어떤 근거로 평가할 수 있을까요? 2. 종교 조직의 지도자가 독립운동의 중심에 서는 일은 운동에 어떤 힘과 부담을 주었을까요?
참고한 자료
아래 공개 자료를 대조해 작성했습니다. 자료마다 서술이 다른 부분은 ‘자료에 따라 다름’으로 표시했습니다. 오류를 발견하시면 오류제보로 알려 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