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채용신 (蔡龍臣, 1848-1941) · Public domain · 출처(Wikimedia Commons)
경기도 포천 출신의 유학자 최익현은 오랫동안 상소로 개항과 일본의 간섭에 맞서다가, 1906년 전라도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체포되어 대마도로 유배된 뒤 1907년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 언제
- 1833
한눈에 보기
최익현(崔益鉉, 1833~1907)은 경기도 포천 출신의 유학자로, 화서 이항로의 문하에서 배웠습니다. 공훈전자사료관은 생년월일을 1833년 12월 5일(음력 기준 서술), 사망일을 1907년 1월 1일(음력 1906년 11월 17일)로 적고 있습니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위정척사의 입장에서 상소를 이어 갔고, 1906년에는 74세의 나이로 전라도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생애와 활동
1833~1895년: 1833년 포천에서 태어나 1846년 이항로의 문인이 되었고, 23세에 명경과에 급제해 관직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1868년 시폐4조, 1873년 오조상소를 올렸으며 그 일로 제주도와 흑산도에서 유배 생활을 했습니다. 1875년에는 개항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고, 1895년에도 상소로 일본의 내정간섭을 비판하다 감금되었습니다. 1896~1905년: 정부가 선유대원 등 관직을 내렸으나 응하지 않았습니다. 1904년 12월에는 고종을 만나 오조수차를 올렸고, 을사늑약 뒤에는 민영환의 자결에 이어 상소로 을사오적의 처벌을 촉구했습니다. 1906년: 2월 호남행을 준비해 4월 17일 태인에 도착했고, 6월 4일 무성서원에서 강회를 열고 의병을 모았습니다. 태인, 정읍, 순창, 곡성 일대를 오가는 동안 병력은 800여 명까지 늘었으나 무장한 인원은 200여 명에 그쳤습니다. 관군과 마주하자 한국인끼리 싸울 수 없다며 해산을 시도했고, 6월 12일 새벽 체포되었습니다. 1906~1907년: 8월 서울에서 감금 3년형을 받아 대마도로 유배되었고, 8월 28일 그곳에 도착했습니다. 이듬해 1월 1일 유배지에서 별세했습니다.
활동 지역
경기도 포천(출생), 충청도 단양(어린 시절 이주), 제주도와 흑산도(유배), 서울(상소와 압송), 전라도 태인·정읍·순창·곡성(의병 활동), 대마도(유배와 별세)가 기록에 나옵니다. 묘소는 충청남도 예산군으로 안내되어 있습니다.
기록이 말해 주는 것
공훈전자사료관에 따르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고, 1993년 1월의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습니다.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 항목은 관련 사건을 을사늑약 반대투쟁과 중기의병으로 분류합니다. 공훈록은 그를 시종 위정척사 사상을 굽히지 않은 인물로 서술하며, 상소 활동을 평화적 항일구국운동으로 보고 이것이 한계에 이르러 무력 투쟁을 결심했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공훈록이 취한 평가 입장이며, 위정척사 사상 자체에 대한 오늘날의 평가는 이 자료만으로 단정하지 않습니다.
관련 사료와 기록
- 최익현 — 독립유공자 공적정보(공적개요·공훈록) (식별번호 10609) —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에 실린 최익현의 생애, 1906년 태인 의병 활동, 대마도 유배와 1962년 대한민국장 추서 내용을 담은 기록입니다.
사진 자료

사진: 정읍시 · 2019-07-24 · CC BY-SA 4.0 · 출처(Wikimedia Commons)

사진: Ahl0051 · 2019-08-30 · CC BY-SA 4.0 · 출처(Wikimedia Commons)
생각해 볼 질문
1. 30년 넘게 상소를 올린 인물이 74세에 무력 투쟁을 택하게 된 배경은 무엇이었을까요? 2. 관군과의 교전을 피하려고 의진을 해산한 판단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참고한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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