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Unknown author (출처: 국내 독립운동 · 국가수호 사적지) · 2017-12-11 (Commons 기재일, 촬영연도 아님) · Public domain · 출처(Wikimedia Commons)
박재혁은 상해에서 의열단에 가입한 뒤 1920년 9월 14일 부산경찰서에 폭탄을 던졌고, 사형이 확정된 뒤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했습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습니다.
- 언제
- 1895
한눈에 보기
박재혁(朴載赫)은 공훈전자사료관 목록에 1895년생, 1921년 사망으로 기록되어 있고 출신지는 부산입니다. 3·1운동 이후 상해로 건너가 의열단에 가입했으며, 1920년 9월 부산경찰서 투탄을 실행했습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습니다.
생애와 활동
부산진보통학교와 부산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한 뒤 전차 차장과 무역상회 고용인으로 일했다고 공훈록은 적습니다. 1917년 6월 상해로 가 무역업에 종사했고, 1918년 6월 귀국했습니다. 1919년 3·1운동 이후 다시 상해로 가 여러 독립운동가와 교류했습니다. 1920년 3월 귀국했다가 8월 상해에서 김원봉을 만나 군자금 300원을 받고 부산경찰서 파괴와 서장 사살을 계획했습니다. 같은 해 9월 6일 부산에 상륙했고, 9월 14일 오후 2시 30분 고서 보따리로 위장한 폭탄을 들고 경찰서를 찾아가 서장과 면담한 뒤 폭탄을 던졌다고 합니다. 본인도 중상을 입고 체포되었습니다. 1920년 11월 6일 부산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 1921년 2월 14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사형, 3월 31일 경성고등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었습니다. 대구형무소에서 형 집행 전에 순국했습니다.
활동 지역
부산, 경상북도 왜관, 상해, 일본 나가사키(경유), 대구(수감)입니다. 공훈록 연표에 나오는 지역만 적었습니다.
기록이 말해 주는 것
공훈전자사료관은 운동계열 ‘중국방면’, 1962년 독립장 추서로 분류하고, 독립유공자공훈록 8권(1990년 발간)에 수록했다고 안내합니다. 2008년 5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도 선정되었습니다. 다만 기록 안의 서술이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공적개요는 서장과 순사 2명을 폭살했다고 적지만, 공훈록 본문은 서장이 부상했고 본인이 중상으로 체포되었다고 서술합니다. 순국 경위도 단식으로 절명했다는 서술과 형 집행 전 옥사했다는 서술이 함께 있습니다. 이름의 한자 표기 역시 자료에 따라 다름이 확인됩니다.
관련 사료와 기록
- 박재혁 공훈록·공적개요(독립유공자 공적정보) (식별번호 관리번호 2388) — 의열단 가입, 1920년 부산경찰서 투탄, 재판 경과와 1962년 독립장 추서가 기록된 상세페이지입니다.
생각해 볼 질문
1. 같은 사건을 두고 공적개요와 공훈록의 서술이 다를 때,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사실에 가까운 내용을 가려낼 수 있을까요? 2. 의열투쟁은 당시 독립운동 전체 안에서 어떤 역할을 했을까요?
참고한 자료
아래 공개 자료를 대조해 작성했습니다. 자료마다 서술이 다른 부분은 ‘자료에 따라 다름’으로 표시했습니다. 오류를 발견하시면 오류제보로 알려 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