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읽는 시간 약 3분

의열단은 어떤 단체였고, 김원봉은 어떤 역할을 했을까요?

분위기를 표현한 AI 역사 재현 이미지입니다 (사료 아님)

의열단은 1919년 11월 만주 길림에서 김원봉을 의백(단장)으로 13명이 조직한 항일 비밀결사로, 폭탄 투척 같은 직접행동으로 일제에 맞섰습니다.

언제
1919-11

왜 의열단을 기억할까요

3·1운동 이후에도 독립은 쉽게 오지 않았습니다. 이때 일부 청년들은 소수의 결사가 직접 행동에 나서서 일제 통치 기관에 타격을 주고, 그 모습으로 민족의 독립 의지를 알리려 했습니다. 의열단은 이런 흐름을 대표하는 단체입니다.

길림에서 시작된 결사

우리역사넷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의열단은 1919년 11월 만주 길림성 길림에서 만들어졌습니다. 백과사전은 11월 9일 밤부터 이야기를 나눈 끝에 10일 새벽 결성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창립 단원은 13명이고, 김원봉이 의백, 곧 단장으로 뽑혔습니다. 단체 이름은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행한다는 뜻입니다. 다만 결성 시기는 자료마다 다릅니다. 김원봉 항목은 1919년 12월로 적고 있어 ‘자료에 따라 다름’으로 보는 것이 안전합니다.

의거와 조선혁명선언

의열단은 1920년 9월 14일 박재혁의 부산경찰서 투탄, 1921년 9월 12일 김익상의 조선총독부 투탄, 1923년 1월 12일 김상옥의 종로경찰서 투탄, 1926년 12월 28일 나석주의 동양척식회사·조선식산은행 투탄 등을 이어 갔습니다. 1920년 3월 밀양·진영으로 폭탄을 들여오려던 계획은 일제에 발각되어 곽재기, 이성우 등이 붙잡혔고, 1922년 3월 28일 상하이 황포탄에서 다나카 기이치 저격을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1924년 1월 5일 김지섭이 도쿄 궁성 앞에 던진 폭탄은 터지지 않았습니다. 1923년 1월에는 신채호가 쓴 조선혁명선언이 나와 민중의 직접 혁명으로 독립을 이루자는 방향을 밝혔습니다.

노선의 변화와 김원봉

백과사전은 1926년 무렵부터 의열단이 사회주의 이론을 받아들였고, 1928년 10월 창단 9주년 성명을 계기로 노선이 바뀌었다고 설명합니다. 1926년 김원봉은 중국 황푸군관학교에 훈련생으로 들어갔고, 이후 개인의 의거보다 조직적인 투쟁으로 방향을 넓혔다고 백과사전은 설명합니다. 1938년에는 중국 국민당 정부의 동의를 얻어 조선의용대가 편성되었고 김원봉이 대장을 맡았습니다. 우리역사넷은 의열단이 1935년에 공식 해체되었다고 소개합니다.

의미와 남는 이야기

의열단의 활동은 국내외 동포에게 독립 의지를 알렸다는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한편 폭력을 수단으로 삼은 방식과 김원봉의 광복 이후 행적(월북 후 북한에서 활동)은 평가가 갈리는 주제입니다. 하나의 기준으로 단정하기보다 시대 상황과 다양한 자료를 함께 살펴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생각해 볼 질문

1. 무장 조직이 직접 행동에 나선 것은 당시 독립운동 전체에서 어떤 역할을 했을까요? 2. 한 인물의 일생에 여러 시기의 행적이 섞여 있을 때,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공정하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참고한 자료

아래 공개 자료를 대조해 작성했습니다. 자료마다 서술이 다른 부분은 ‘자료에 따라 다름’으로 표시했습니다. 오류를 발견하시면 오류제보로 알려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