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unkonown (페이지 표기 그대로; 출처 http://100.empas.com/dicsearch/pimage.html?i=120284001&en=120284) · no later than 1938 · Public domain · 출처(Wikimedia Commons)
황해도 재령 출신으로 1926년 12월 28일 서울의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에서 의거를 벌인 의열단원으로 기록된 독립운동가입니다.
- 언제
- 1892
한눈에 보기
나석주(羅錫疇)는 공훈전자사료관에 1892년 2월 4일 태어나 1926년 12월 28일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황해도 재령 출신이며 운동계열은 의열투쟁입니다. 의열단에 가입한 뒤 1926년 서울의 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에서 거사를 벌였다고 공훈록은 서술합니다.
생애와 활동
공적개요에 따르면 재령 명신학교를 2년 수료한 뒤 농사를 지었고, 23세에 간도로 가 4년간 군사훈련을 받았습니다. 27세에 귀국해 황해도 겸이포에서 상업을 하며 정보를 모았다고 합니다. 3·1운동 뒤에는 임시정부 군자금을 마련하고 결사대를 조직해 평산군 주재소 경찰과 면장을 쏘았으며, 안악군의 친일 부호를 살해한 뒤 1920년 9월 상해로 망명했다고 공훈록은 적습니다. 상해에서는 임시정부 경무국 경호원으로 일했고 한단군관학교를 졸업해 중국군 장교로 복무했다고 합니다. 의열단에 가입한 그는 1926년 4월 천진에서 김창숙을 만나 식민지 경제 수탈 기관의 파괴를 권유받고 이를 실행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12월 26일 천진을 떠나 27일 인천에 도착했습니다. 12월 28일 식산은행 대부계 앞에서 폭탄을 던지고 동양척식회사에서 총격을 가했으며, 이후 경찰의 추격을 받아 자결을 시도해 숨졌다고 기록됩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인 여러 명이 숨지거나 다쳤습니다. 1927년 5월 장남이 상경해 유해를 인도받았다고 합니다.
활동 지역
확인되는 지역은 황해도(재령, 겸이포, 평산, 안악), 간도, 상해, 하남성 한단, 천진, 위해위, 인천, 서울(남대문통, 황금정 일대)입니다.
기록이 말해 주는 것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고, 1992년 1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기록이 있습니다. 묘소는 국립서울현충원이며, 서울 중구의 동상과 밀양 의열기념관이 관련 현충시설로 안내됩니다. 공적개요와 공훈록은 거사 당시 피해자의 이름과 직책 표기에서 서로 차이가 있어, 세부 표기는 하나의 자료로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의열투쟁으로 인명 피해가 따랐다는 점은 기록이 그대로 적고 있으며, 그 수단에 대한 평가는 이 페이지가 다루는 범위 밖입니다.
관련 사료와 기록
- 독립유공자 공훈록 나석주 (식별번호 1537) — 공훈전자사료관의 나석주 공적정보 페이지로, 1926년 식산은행·동양척식주식회사 의거와 1962년 서훈 내용이 정리되어 있습니다.
생각해 볼 질문
1. 경제 수탈 기관을 표적으로 삼았다는 기록은 의열투쟁의 목적을 어떻게 보여 줄까요? 2. 같은 사건을 두 가지 서술이 다르게 표기할 때, 어떤 방식으로 사실을 확정해 갈 수 있을까요?
참고한 자료
아래 공개 자료를 대조해 작성했습니다. 자료마다 서술이 다른 부분은 ‘자료에 따라 다름’으로 표시했습니다. 오류를 발견하시면 오류제보로 알려 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