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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무관학교는 어떻게 독립군을 길러 냈을까요?

분위기를 표현한 AI 역사 재현 이미지입니다 (사료 아님)

신흥무관학교는 신민회 계열 인사들이 1911년 만주 삼원보에서 세운 신흥강습소에서 출발해, 1919년 5월 3일 이름을 바꾸고 독립군 간부를 길러 낸 학교입니다.

언제
1911

왜 학교가 중요했을까요

무장 독립운동을 이어 가려면 총만큼이나 훈련된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신흥무관학교는 만주에서 독립군 간부를 키운 대표적인 교육 기관입니다.

신민회와 삼원보

독립기념관 자료에 따르면 신민회는 1909년 무렵부터 만주에 사람을 보내 기지 후보지를 살폈습니다. 1911년 4월에는 삼원보 고산자에서 300여 명이 모인 대회를 열어 독립 기지를 세우기로 뜻을 모았다고 합니다. 신민회는 해외에 독립운동 기지를 세우기 위해 1910년 7월 이동녕, 이회영 등을 보내 남만주 유하현 삼원보 일대를 답사하고 터를 정했습니다. 1911년 이곳에서 자치 조직 경학사를 만들고, 그 부설로 신흥강습소를 열었습니다. 소장은 이동녕이었고, 김창환, 남상복, 이장녕, 이세영, 이관직 등이 교관을 맡았다고 합니다. 첫해에 40여 명이 졸업했습니다. 경학사 임원은 자료마다 다르게 적혀 있습니다.

합니하로, 그리고 고산자로

삼원보가 사람들의 눈에 띈다는 이유로 학교는 통화현 합니하로 옮겼습니다. 이석영이 전답을 팔아 마련한 돈이 비용에 쓰였습니다. 1913년 5월에는 신흥중학교로 이름을 바꾸어 군사반만 남겼고, 1919년 5월 3일 신흥무관학교로 개명했습니다. 3·1운동 뒤 지청천, 이범석 등이 교관으로 참여했습니다.

어떻게 가르쳤을까요

교육과정은 3개월 하사관반, 1개월 특별훈련반, 6개월 장교반으로 나뉘었다고 합니다. 군사 훈련뿐 아니라 국어, 역사, 지리 같은 과목도 가르쳐 민족의식을 키우려 했습니다. 단순히 병사를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나라를 되찾을 때 중심이 될 사람을 기르려 한 것입니다.

폐교와 졸업생들

흉작으로 재정이 어려웠고 학생 갈등, 마적의 납치 사건도 겹쳤습니다. 일제의 탄압도 이어져 1920년 학교는 문을 닫았습니다. 시기는 8월 또는 가을로 자료에 따라 다릅니다. 졸업생 수도 2,000여 명(대백과, 독립기념관)과 약 3,500명(공훈전자사료관)으로 자료마다 다릅니다. 독립기념관 자료는 폐교 때 지청천이 생도 300명 가량을 이끌고 홍범도 부대에 합류했다고도 전합니다(단일 출처). 졸업생들은 서로군정서, 북로군정서, 대한독립군 등에서 활동했고, 청산리전투와 봉오동전투의 핵심 인물 다수가 이 학교 출신이라고 설명됩니다.

생각해 볼 질문

1. 군사 훈련과 함께 역사와 국어를 가르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2. 자료마다 졸업생 수가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요? 숫자를 소개할 때 어떻게 표기하면 좋을까요?

참고한 자료

아래 공개 자료를 대조해 작성했습니다. 자료마다 서술이 다른 부분은 ‘자료에 따라 다름’으로 표시했습니다. 오류를 발견하시면 오류제보로 알려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