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LERK · 2018-09-15 (촬영) · CC BY-SA 4.0 · 출처(Wikimedia Commons)
이윤재(1888~1943)는 경상남도 김해 출신의 국어학자이자 교육자로, 한글맞춤법통일안 작성과 사전 편찬 준비에 참여했습니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구금된 뒤 1943년 함흥형무소에서 옥중 순국한 것으로 공훈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 언제
- 1888
한눈에 보기
이윤재(李允宰)는 공훈전자사료관 목록에 1888년생, 1943년 사망으로 올라 있는 경상남도 김해 출신 인물입니다. 운동 계열은 문화운동으로 분류됩니다. 3·1운동 관련 투옥, 한글맞춤법통일안과 조선어사전 편찬 준비 참여, 조선어학회 사건 후의 옥중 순국이 주요 활동으로 정리되어 있습니다.
생애와 활동
1905~1910년 무렵에는 김해 합성학교 교사로 일했고, 마산 창신학교와 의신여학교에서 국사와 국어를 가르쳤다고 공훈록에 서술되어 있습니다. 1919년에는 영변에서 3·1운동에 관계하여 체포되었고,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아 평양감옥에서 복역했다고 합니다. 1921~1925년에는 중국으로 건너가 신채호 등과 교류하며 베이징대학 사학과를 마쳤고, 이후 정주 오산학교에서 교육에 종사하며 흥사단에 가입했다고 기록됩니다. 1927~1936년에는 잡지 『한빛』 창간, 조선어사전편찬회 조직, 한글맞춤법통일안 작성 참여 등 우리말 정리 작업에 힘썼습니다. 조선어학회에서는 하기 한글강습회를 이끌고 표준어 사정 작업을 주관했으며, 1933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의 완성과 보급에도 힘썼다고 합니다.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되었고,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홍원경찰서에 구금되었다가 1943년 함흥형무소에서 숨졌습니다.
활동 지역
김해, 마산, 영변, 평양, 중국(베이징), 정주, 서울(서대문감옥), 홍원, 함흥이 공훈록에 나타납니다. 수형기록에는 1919년 7월 31일 고등법원 상고 기각 등 여섯 건의 재판·인물카드 항목이 정리되어 있습니다.
기록이 말해 주는 것
공훈전자사료관은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고, 독립유공자공훈록 6권(1988년 발간)에 수록되었으며, 1998년 1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와 관련된 인물로 표시한다고 적고 있습니다. 묘소는 대전현충원입니다. 다만 순국일은 공적개요에는 1943년 9월 12일, 본문에는 12월 8일로 달리 적혀 있어 자료 안에서도 차이가 있습니다. 서훈 내용은 기록이 말하는 사실이고, 한글 운동의 역사적 의의에 대한 평가는 연구자와 시각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관련 사료와 기록
- 독립유공자 공적정보 — 이윤재(李允宰) (식별번호 11314) — 공훈전자사료관 공적정보 상세페이지로, 이윤재의 포상 내역과 공훈록 공적개요, 수형기록이 정리되어 있습니다.
생각해 볼 질문
1. 말과 글을 정리하는 일이 독립운동으로 다뤄진 까닭은 무엇일까요? 2. 같은 인물의 순국일이 기록마다 다를 때, 우리는 어떻게 사실을 확인해야 할까요?
참고한 자료
아래 공개 자료를 대조해 작성했습니다. 자료마다 서술이 다른 부분은 ‘자료에 따라 다름’으로 표시했습니다. 오류를 발견하시면 오류제보로 알려 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