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준비위원회(건준)는 광복 직후 여운형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건국 준비 단체로, 좌우 갈등 속에 1945년 9월 조선인민공화국 선포와 함께 해체되었습니다.
- 언제
- 1945-08-15
광복의 소식, 그리고 빈자리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면서 한반도는 광복을 맞았습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곧바로 풀어야 할 숙제가 생겼습니다. 치안은 누가 지키고, 새 나라의 틀은 누가 준비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이 빈자리를 메우려고 가장 먼저 나선 단체가 건국준비위원회입니다.
여운형과 건준의 출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여운형은 8월 15일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와 만나 협상을 했습니다. 정치·경제범의 즉각 석방, 3개월간의 식량 보급, 치안과 건국 사업에 간섭하지 않을 것 등이 조건이었습니다. 이튿날인 16일에는 서울 휘문중학교에서 경과를 알리는 연설회가 열렸고, 17일에 위원장 여운형, 부위원장 안재홍을 중심으로 한 중앙 조직이 발표되었고, 18일에는 첫 위원회가 열렸습니다. 치안을 맡을 치안대도 꾸려졌고, 8월 26일 무렵부터는 지방에도 위원회가 만들어졌습니다.
엇갈리는 길, 그리고 인민공화국
건준 안에서는 곧 갈등이 드러났습니다. 8월 22일 중앙 조직이 33명으로 확대되었지만, 8월 25일 좌우 확대 위원 명단을 두고 협상이 깨졌습니다. 여운형은 8월 31일 사직 의사를 밝혔고, 9월 1일에는 사회주의 계열 중심의 확대 위원 135명 명단이 발표되었습니다. 그리고 9월 6일 서울에서 600여 명이 모인 전국인민대표자대회가 열려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이 발표되었습니다. 미군이 들어오기 직전의 급박한 상황이었고, 건준은 9월 7일 해체되었습니다.
남은 과제와 의미
인민공화국의 명단에는 이승만을 주석으로, 여운형을 부주석으로 올리는 등 해외에서 돌아올 인사들까지 포함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승만은 취임을 거절했고, 10월 10일 미군정은 남한에는 군정만 있다는 취지의 성명으로 인공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건준은 짧게 존재했지만, 광복 직후 우리 손으로 질서를 세우려 한 첫 시도였다는 점과 좌우 합작이 어려웠던 해방 공간의 모습을 함께 보여 줍니다. 평가는 학자마다 다르므로 여러 시각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편 인공 쪽 인사들은 11월 무렵 조선인민당 등으로 다시 모였고, 이듬해 2월에는 민주주의민족전선으로 모였다고 전해집니다. 건준에서 시작된 흐름이 다른 이름으로 이어진 셈입니다.
생각해 볼 질문
1. 치안과 행정이 비어 있던 광복 직후, 건준 같은 단체가 필요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2. 좌우 세력이 하나로 모이지 못한 까닭은 무엇이며, 어떻게 했다면 달라질 수 있었을까요?
참고한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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