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는 헌병·경찰과 군대까지 동원해 3·1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했고, 큰 인명 피해와 제암리 학살 같은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이후에는 통치 방식을 겉으로 바꾸었습니다.
- 언제
- 1919-03-01
왜 중요할까요?
3·1운동은 평화적인 만세 시위였지만, 일제는 무력으로 맞섰습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거나 다쳤습니다. 당시 상황을 정확히 아는 일은 운동의 의미를 이해하는 첫걸음입니다. 이 글에서는 운동이 어떻게 퍼졌는지, 일제가 어떻게 대응했는지, 그리고 자료마다 숫자가 다른 이유까지 함께 살펴봅니다. 숫자 뒤에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있었다는 점을 기억하며 읽어 주세요.
운동은 어떻게 퍼졌나요?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된 시위는 점차 전국으로 번졌고, 3월 21일 제주 조천리 시위로 전국 13도에 이르렀습니다. 만주, 연해주, 미주 등 국외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전국과 해외로 번졌다는 점에서 3·1운동은 한 지역의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일제는 어떻게 탄압했나요?
일제는 헌병과 경찰을 곳곳에 배치했고, 정규 일본군 2개 사단을 투입해 진압했습니다. 시위대에 총을 쏘고, 학교·교회·민가를 불태우는 일도 있었습니다. 피해 규모는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실린 수치가 널리 인용됩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사망 7,509명, 부상 15,961명, 체포 46,948명으로 소개합니다. 같은 책을 근거로 한 우리역사넷의 다른 서술에는 부상 15,850명, 체포 45,306명으로 나옵니다(자료에 따라 다름). 이 수치는 당시 보고에 근거한 것이어서 실제 피해는 더 컸을 수 있다고 설명됩니다. 대표적인 비극이 1919년 4월 15일의 화성 제암리 사건입니다. 일본군은 주민들을 교회에 모아 가둔 뒤 사격하고 불을 질렀습니다. 희생자 수는 자료에 따라 20여 명, 28명, 29명 등으로 다르게 나옵니다. 이 소식은 외국인들을 통해 알려져 국제 사회의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 뒤에는 어떻게 되었나요?
국제 여론이 나빠지고 독립운동이 퍼지자, 일제는 무단통치를 이른바 문화통치로 바꾸었습니다. 헌병경찰제를 보통경찰제로 바꾸고 태형을 없앴으며 한국인 신문 발행을 허가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경찰과 군 병력이 늘어, 회유를 위한 겉모습이었다고 평가됩니다. 한편 3·1운동으로 세계의 관심이 한국에 쏠렸고,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세워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사진 자료

사진: Noh Mun Duek · 2013-02-02 · CC BY-SA 4.0 · 출처(Wikimedia Commons)
생각해 볼 질문
1. 피해 통계가 자료마다 다른 까닭은 무엇일까요? 역사 자료를 읽을 때 어떤 점을 살펴야 할까요? 2. 일제의 통치 방식 변화가 정말 달라진 것이었는지, 근거를 들어 생각해 봅시다.
참고한 자료
아래 공개 자료를 대조해 작성했습니다. 자료마다 서술이 다른 부분은 ‘자료에 따라 다름’으로 표시했습니다. 오류를 발견하시면 오류제보로 알려 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