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11월 28일 충칭의 임시정부는 삼균주의를 바탕으로 광복 뒤 새 나라의 설계도인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발표했습니다. 헌법은 아니지만 임시정부의 지도 이념을 보여 줍니다.
- 언제
- 1941-11-28
독립 이후를 준비한 정부
독립운동은 일제를 몰아내는 일만이 아니라, 그 뒤에 어떤 나라를 세울지 준비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충칭 시기 임시정부는 후자를 글로 남겼습니다. 바로 대한민국 건국강령입니다.
상하이에서 충칭까지
임시정부는 1932년 5월 윤봉길 의거 뒤 상하이를 떠나 여러 곳을 옮겨 다녔습니다. 1938년 7월부터 1939년 4월 사이에는 광저우와 류저우 등을 거쳤고, 1940년 9월 치장에서 충칭으로 옮겨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해 9월 15일에는 한국광복군 창설을 선포했습니다. 이처럼 오랜 이동 끝에 정부 조직을 정비하던 중에 건국강령이 나왔습니다. 그동안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광복 이후의 청사진을 구체적으로 정리하려 했던 것입니다.
건국강령의 내용
건국강령은 1941년 11월 28일 국무회의에서 약간의 수정을 거쳐 국무위원회 명의로 발표되었습니다. 초안은 조소앙이 썼습니다. 총강, 복국, 건국의 3장 24개항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우리역사넷이 설명합니다. 다만 항 수를 22개로 소개하는 자료도 있어 자료에 따라 다름입니다. 핵심은 삼균주의입니다. 정치, 경제, 교육에서 고르게 기회를 보장한다는 생각입니다. 민주공화국을 세우고, 보통선거와 기본권을 보장하며, 의무교육을 국가가 책임진다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경제에서는 토지와 큰 생산기관을 국유로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중소기업의 사영은 허용했습니다. 일본에 협력한 사람은 선거권에서 제외한다고 했습니다. 이는 광복 뒤 친일 문제를 어떻게 다룰지에 대한 구상이기도 했습니다.
결과와 의미
건국강령은 정식 헌법은 아니고, 해방 뒤 국가 운영의 방향을 밝힌 문서입니다. 임시정부는 독립운동 역량을 모으고 지도 이념을 세우려는 뜻에서 이를 만들었고, 광복군과 임시의정원 의원들에게 강령 준수를 서약하게 했다고 합니다. 평가는 하나로 모이지 않습니다. 1948년 제헌헌법이 민주공화국 같은 원칙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보는 설명이 있지만, 제헌헌법은 토지의 사유를 유지하고 농지를 유상으로 분배하도록 해 강령의 토지 국유 방침과는 달랐습니다. 임시의정원 안에서도 토지 국유화와 헌법상 지위를 두고 비판이 있었다고 합니다.
사진 자료

사진: 국외항일운동유적(지) 실태조사보고서 · 1944-01-01 · Public domain · 출처(Wikimedia Commons)

사진: Qa003qa003 · 2018-04-30 · CC BY-SA 4.0 · 출처(Wikimedia Commons)
생각해 볼 질문
1. 나라를 되찾기 전에 미리 새 나라의 모습을 정해 두는 일은 왜 중요했을까요? 2. 건국강령의 어떤 내용이 오늘날 우리 사회의 원칙과 닿아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참고한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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