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만세운동, 광주학생항일운동, 원산총파업, 조선어학회 사건을 둘러싼 참가·검거·처벌 수치를 자료의 집계 주체와 함께 정리한 글입니다.
- 언제
- 1926
이 글은 6관에서 다루는 학생, 노동자, 우리말 연구자의 저항을 검거·처벌·동원 규모라는 숫자로 살펴봅니다. 숫자는 사건의 크기를 가늠하게 해 주지만, 대부분 일제 경찰과 총독부 기록을 바탕으로 한 서술이어서 실제 참여자를 그대로 보여 주지는 못합니다. 같은 사건도 자료마다 수치가 다르므로, 표마다 어디서 나온 숫자인지 함께 적었습니다.
6·10만세운동: 인산일의 경계와 검거
인산일에는 수십만 명이 모였고, 일제는 이를 경계해 병력과 경찰을 대규모로 배치했습니다.
| 항목 | 수치 | 비고 |
|---|---|---|
| 인산일 봉도 인원 | 30만 명 | 집계 주체 미기재 |
| 그중 학생 | 약 2만 4,000여 명 | 보통학교 6학년 이상, 집계 주체 미기재 |
| 경계 병력 | 군대 5,000명, 정사복 경찰 2,000명 이상 | 본문 서술 |
| 서울에서 붙잡힌 인원 | 210여 명 | 일경 집계 인용(종로서 150, 동대문서 50, 본정서 10여 명) |
| 전국에서 붙잡힌 인원 | 1,000여 명 | 본문 서술 |
| 취조받은 학생 | 106명 | 동아일보 보도 등 인용 |
| 구속 기소 | 11명 | 1926년 6월 25일, 제령 제7호 및 출판법 위반 |
출처: 출처: 우리역사넷 국사 「6·10학생운동의 전개」 (contents.history.go.kr).
붙잡힌 사람은 전국 1,000여 명이었지만 실제로 기소된 사람은 11명이었습니다. 검거의 범위가 처벌 범위보다 훨씬 넓었음을 보여 줍니다.
광주학생항일운동: 참가 규모와 징계
학생운동은 광주에서 시작해 서울과 평양, 진주 등 여러 지역으로 번졌습니다.
| 항목 | 수치 | 집계 주체·비고 |
|---|---|---|
| 참가 학교 수 | 194개교 (초등 54, 중등 146, 고등 4) | 일제 총독부 기록. 자료에 따라 다름 |
| 참가 학교 수 | 320개 | 광주광역시교육청 (2006). 자료에 따라 다름 |
| 참가 학교 수 | 350여 개 (조선인 관련 학교) | 학생독립운동기초자료발굴팀 등. 자료에 따라 다름 |
| 참가 학생 수 | 약 5만 4,000여 명 | 위 194개교 집계에 딸린 수치 |
| 퇴학 처분 | 582명 | 전국 집계 |
| 무기정학 | 2,330명 | 전국 집계 |
| 피검자 | 1,462명 | 전국 집계 |
| 광주 1차 시위 구속·송치 | 60여 명 | 가두시위 조선인 학생 70여 명 중, 검사국 송치 |
출처: 출처: 우리역사넷 국사 「광주학생운동의 전국적 확대」 및 우리역사넷 「광주학생항일운동 1929」 (contents.history.go.kr), 한국사데이터베이스 (db.history.go.kr).
참가 학교 수는 일제 기록에서는 194개교였지만 이후 조사에서는 320개, 350여 개로 늘어났습니다. 이는 일제가 파악한 범위와 후대 연구가 확인한 범위가 달랐음을 보여 줍니다.
원산총파업: 노동자와 동원된 인력
원산은 항구 노동자가 많았고, 노동조합이 연합회로 묶여 있었습니다.
| 항목 | 수치 | 비고 |
|---|---|---|
| 파업 기간 | 1929년 1월 13일~4월 6일 | 연합회 긴급집행위원회 결정일부터 자유취업 결의일까지 |
| 참가 노동자 | 2,200여 명 | 원산노동연합회 산하 조합원 (해륙운수 1,800여 명, 기공적 직업 400여 명) |
| 참가 노조 수 | 24개 / 23개 | 총파업 항목은 24개, 연합회 항목은 23개로 서술. 자료에 따라 다름 |
| 생활난을 겪은 가족 | 1만 명 이상 | 본문 서술 |
| 일본인 재향군인 동원 | 400여 명 | 파업 대응 인력 |
| 함흥보병대 군인 | 약 300명 | 파업 대응 인력 |
| 인천 노동자 동원 | 200여 명 | 파업 대응 인력 |
| 구속·검거 | 간부 7, 8명 구속, 노동자 40여 명 검거 | 본문 서술 |
출처: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원산총파업」과 「원산노동연합회」 항목 (encykorea.aks.ac.kr).
사용자 측은 재향군인과 외부 노동자까지 끌어들여 파업에 맞섰습니다. 두 항목의 노조 수 표기가 달라 이 부분은 한쪽으로 단정하지 않았습니다.
조선어학회 사건: 검거에서 판결까지
일제는 1942년 가을부터 사전 편찬에 참여한 학회 관계자들을 잇달아 붙잡았습니다.
| 항목 | 수치 | 비고 |
|---|---|---|
| 검거된 관련자 | 33명 | 1943년 4월 1일까지 |
| 이 가운데 구속 | 29명 | 본문 서술 |
| 증인 조사 | 48명 | 본문 서술 |
| 검사 처분 | 기소 16명, 기소유예 12명 | 치안유지법 위반 |
| 공판에 넘겨진 인원 | 12명 | 1944년 12월 21일~1945년 1월 16일, 9회, 함흥지방법원 |
| 옥중 사망 | 2명 (이윤재, 한징) | 본문 서술 |
| 실형 선고 | 이극로 징역 6년, 최현배 4년, 이희승 2년 6개월, 정인승·정태진 각 2년 | 장현식은 무죄 |
출처: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선어학회 사건」 및 우리역사넷 「조선어학회사건」 (encykorea.aks.ac.kr, contents.history.go.kr).
검거된 사람에 비해 실형을 받은 사람은 적었지만, 이윤재와 한징은 재판이 끝나기 전에 옥중에서 숨졌습니다.
숫자를 읽을 때 유의할 점
이 글의 숫자는 대부분 일제 경찰과 총독부, 또는 이를 인용한 후대 서술에서 나왔습니다. 검거 수치는 당국이 파악한 범위일 뿐 실제 참여자 전체를 뜻하지 않습니다.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참가 학교 수는 일제 기록과 후대 조사 결과가 달라 같은 사건에서도 194개교, 320개, 350여 개로 갈립니다. 같은 항목 안에서도 세부 항목의 합과 총수가 맞지 않게 표기된 곳이 있어, 이 글은 원문 수치를 그대로 옮기고 새로 합산하지 않았습니다. 원산총파업의 노조 수도 항목에 따라 24개와 23개로 서술이 다릅니다. 백과사전과 우리역사넷의 글은 집필자의 견해이므로, 연구가 진행되면 수치가 바뀔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볼 질문
당국이 남긴 검거 기록만으로 저항에 참여한 사람들의 규모를 얼마나 알 수 있을까요?
학교 수가 194개교에서 350여 개로 달라진 것은 누가, 어떤 기준으로 세었는지에 따른 차이일까요?
참고한 자료
아래 공개 자료를 대조해 작성했습니다. 자료마다 서술이 다른 부분은 ‘자료에 따라 다름’으로 표시했습니다. 오류를 발견하시면 오류제보로 알려 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