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
1910년 강제병합 이후 일제는 무단통치와 토지조사사업 등 경제적 수탈을 이어가, 대다수 민중의 생활이 위협받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말 미국 윌슨 대통령이 내세운 민족자결주의는 원래 패전국 식민지에 한정된 원칙이었지만, 민족운동가들은 독립 의지를 알릴 기회로 받아들였다.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세상을 떠나자 독살설이 퍼지며 민심이 크게 흔들렸고(일제는 사망을 23일에야 발표했다), 2월 8일 도쿄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 소식이 국내에 전해지며 준비가 본격화되었다.
전개
천도교·기독교·불교 인사와 학생들이 준비를 합쳤고, 민족대표 33인이 정해졌으며 독립선언서 2만 1천 매가량이 인쇄되었다. 거사일은 고종의 장례(인산) 날짜를 피해 3월 1일로 잡혔다. 이날 오후 2시 무렵 서울 인사동 태화관에서는 민족대표 29명이 독립선언을 하고 경찰에 연행되었고, 같은 시각 탑골공원에서는 학생과 시민이 따로 선언서를 낭독한 뒤 거리 행진에 나섰다. 같은 날 평안도·황해도·함경남도의 주요 도시에서도 시위가 시작되었다. 이후 전국으로 번져 우리역사넷은 4월 말까지 전국 220개 군 중 218개 군에서 시위가 일어났다고 정리한다. 해외에서는 북간도, 서간도, 연해주 등지에서 시위가 전개되었다.
피해 규모
피해 수치는 자료마다 다르다. 우리역사넷은 공식 집계로 사망 7,500여 명, 부상 16,000여 명, 투옥 47,000여 명, 불탄 곳은 교회 47곳·학교 2곳·민가 715호라고 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 기준 사망 7,509명, 부상 15,961명, 체포 46,948명을 소개하되 이는 운동 당시의 집계라고 밝힌다. 우리역사넷의 다른 서술은 사상자 2만여 명, 투옥 5만여 명으로 적는다. 참가 인원도 일제 측 자료의 약 110만 명과 200만 명 이상이라는 추산이 엇갈린다.
결과와 의미
일제는 무단통치를 이른바 문화통치로 바꾸었으나, 대백과는 이를 외형적 변화에 그쳤다고 평가한다. 운동을 계기로 민주공화제를 내세운 임시정부 수립의 필요가 제기되어 1919년 4월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세워졌다. 운동 이후 민족운동은 여러 갈래로 나뉘었으며, 만주와 연해주 등지의 무장투쟁도 본격화되었다고 우리역사넷은 설명한다.
참고한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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