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Unknown author · 1920 · Public domain · 출처(Wikimedia Commons)
서일은 중광단과 북로군정서(대한군정서)를 조직해 총재를 맡았고, 김좌진을 사령관으로 청산리 전투를 뒷받침한 대종교인입니다. 1921년 순국했고 1962년 독립장을 받았습니다.
- 언제
- 1881
한눈에 보기
서일(徐一, 호 백포)은 함북 경원 출신으로 공훈전자사료관 목록에는 1881~1921로 올라 있습니다. 대종교를 신봉하며 만주에서 교육과 독립운동을 펼쳤고, 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의 총재로서 김좌진과 함께 청산리 전투 시기의 독립군을 이끌었습니다.
생애와 활동
1911년 동만 왕청현으로 망명해 청일학교·명동중학교를 세우며 교육에 힘썼고, 대종교 시교사로 활동하며 여러 교리 저술을 남겼습니다. 두만강을 넘어온 의병들을 모아 중광단을 조직했고, 1919년에는 38인과 함께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고 공훈록은 적습니다. 1919년 8월 정의단을 개편해 대한군정서를 조직하고 총재가 되었으며, 김좌진을 총사령 겸 사관연성소 소장으로 임명해 독립군을 양성했습니다. 1920년 청산리 전투 뒤에는 밀산에서 대한독립군단이 편성되자 총재로 추대되었습니다. 이후 밀산현 당벽진에서 교서 저술에 전념하던 중 1921년 토비의 습격으로 청년 동지들이 희생되자 자결 순국했다고 합니다.
활동 지역
함북 경원(출신지), 만주 동만 왕청현(서대파구, 십리평), 청산리 일대, 북만 밀산(당벽진)이 공훈록에 나타납니다. 공훈록은 본영을 서대파구에 두고 십리평 산림 속에서 군사 훈련을 했다고 적습니다.
기록이 말해 주는 것
공훈전자사료관은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와 1992년 8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선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순국 시점은 같은 페이지 안에서도 공적개요(1921년 8월 26일 자결)와 공훈록 본문(9월 27일 습격, 이튿날 28일 자결)이 달라 자료에 따라 다름으로 둡니다. 청산리 전과(일본군 사살 수)는 공훈록의 서술이며, 전과 수치는 연구에 따라 평가가 갈리므로 수치 자체보다 지휘 체계 속 서일의 역할에 주목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관련 사료와 기록
- 독립유공자 공적정보 – 서일(徐一) (식별번호 2762) — 공적개요와 독립유공자공훈록 4권 수록 내용으로 대한군정서 총재 활동, 순국, 1962년 독립장 서훈이 정리된 페이지입니다.
사진 자료

사진: Unknown author · 1920 · Public domain · 출처(Wikimedia Commons)

사진: H2v5o68z · 2026-05-02 · CC0 · 출처(Wikimedia Commons)

사진: H2v5o68z · 2026-05-02 · CC0 · 출처(Wikimedia Commons)
생각해 볼 질문
교육, 종교, 무장투쟁이 한 사람의 활동 안에서 어떻게 이어졌을까요? 전투를 이끈 사령관과 조직을 세운 총재의 역할은 기록에서 어떻게 달리 남을까요?
참고한 자료
아래 공개 자료를 대조해 작성했습니다. 자료마다 서술이 다른 부분은 ‘자료에 따라 다름’으로 표시했습니다. 오류를 발견하시면 오류제보로 알려 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