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읽는 시간 약 8분

숫자로 보는 식민지 지배와 피해

분위기를 표현한 AI 역사 재현 이미지입니다 (사료 아님)

토지·임야 조사, 쌀 생산과 일본 유출, 강제동원, 창씨개명에 관한 공신력 있는 통계를 집계 주체와 함께 정리했습니다.

언제
1910

이 글은 식민지 지배가 토지, 식량, 사람, 이름에 걸쳐 어떤 규모로 이루어졌는지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우리역사넷에 실린 수치로 살펴봅니다. 같은 사안도 집계 주체와 기준에 따라 숫자가 다르므로, 표마다 출처와 기준을 함께 적었습니다. 숫자는 사실의 일부만 보여 주므로, 당시 사람들의 삶을 읽는 출발점으로 삼아 주시기 바랍니다.

토지조사사업과 임야조사사업

토지조사사업은 근대적 토지 소유 제도를 만든 사업이라는 평가와 식민 통치의 재정·토지 기반을 만든 사업이라는 평가가 맞섭니다. 아래 표는 두 평가가 모두 근거로 삼는 규모 수치입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토지조사사업’·’임야조사사업’ 항목과 우리역사넷 『신편 한국사』 47권의 수치입니다. 원자료는 주로 조선총독부 보고서와 후대 연구자의 정리입니다. 1910~1918년 전후.
항목수치비고
토지조사사업 사업비(1910~1918)2,456만 원우리역사넷, 『조선토지조사사업보고서』 등 인용
총독부가 확보한 국유 농경지(1910년 9월)약 128,800정보대백과. 이 중 약 96,700정보는 민유지를 국유로 편입한 것이라고 서술
국유 농경지(1919년 2월)약 137,224.6정보대백과
역둔토 총면적(1912년)133,633정보우리역사넷. 대백과 수치와 집계 시점·범위가 달라 자료에 따라 다름
조선총독부 소유지(1918년 12월)272,076정보우리역사넷, 『관보』 인용. 위 국유 농경지와 범위가 다름
지세 징수액1911년 6,245,000여 원 → 1920년 11,570,000여 원우리역사넷, 조석곤(1995) 연구 인용
토지 분쟁33,937건(99,445필지)우리역사넷. 이 중 국유지와의 분쟁이 64,570필지
농가 구성(1918년)자작농 19.7%, 자소작농 39.4%, 소작농 37.8%우리역사넷
연고림 명목 임야 국유화337만 5000정보대백과 ‘임야조사사업’. 별도로 사유림 중 적어도 160만 정보가 국유로 편입되었다고 서술
임야 사정 완료 필지 / 불복 신청3,479,915필 / 111,377건대백과. 사정은 1917~1924년, 재결은 1935년 완결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우리역사넷(국사편찬위원회) 해당 항목에서 확인한 값이며, 두 자료의 집계 기준이 달라 직접 비교할 수 없습니다.

국유지 면적이 자료마다 다른 것은 역둔토, 궁장토, 총독부 소유지처럼 포함 범위가 다르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임야조사사업까지 합치면 국유로 편입된 땅의 규모가 상당했다는 점이 서술되어 있습니다.

쌀 생산과 일본 유출

1920년 산미증식계획은 1차로 약 900만 석 증산과 460만 석 반출을 계획했다고 우리역사넷 『신편 한국사』 48권은 서술합니다. 실제 숫자는 어떻게 움직였을까요.

우리역사넷 『쌀은 우리에게 무엇이었나』에 실린 표입니다. 원 표의 출처는 富田晶子 외(1984)의 식민지기 조선 통계 연구이며, 연구자가 조선총독부 통계 등을 재정리한 것입니다. 1912~1936년.
연도총생산량(만 석)총수출량(만 석)유출 비율(%)1인당 연 소비량(석)
19121,156524.50.77
19161,28418214.20.67
19201,27018614.70.63
19241,51747531.30.60
19281,72974242.90.54
19321,58775847.80.41
19361,78895153.20.38

출처: 우리역사넷 한국문화사 26권 ‘쌀의 유출’ 페이지의 표를 옮겼으며, 1940년 행은 표 안의 비율이 맞지 않는 것으로 보여 제외했습니다.

생산량이 늘어난 폭보다 수출량이 늘어난 폭이 컸고, 1인당 소비량은 같은 기간 줄어든 것으로 표에 나타납니다. 다만 1인당 소비량은 다른 자료에서 연도별 값이 조금씩 다르게 제시되기도 합니다.

강제동원의 규모

강제동원은 노무, 병력, 군무원, 일본군 ‘위안부’ 등으로 나뉘며 지역도 한반도, 일본, 중국, 동남아시아, 태평양 등으로 넓었습니다. 집계 방식이 달라 한 가지 숫자로 정리하기 어렵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선인 강제동원’ 항목의 수치입니다. 당시 일본 정부 통계, 한국 정부 피해조사위원회(2016) 보고, 항목 집필자의 추정이 섞여 있어 행마다 집계 주체를 적었습니다. 1939~1945년경.
구분수치집계 주체·성격
동원 연인원(‘위안부’ 제외)7,804,376당시 일본 정부 통계를 인용한 값
피해조사 총계(중복 포함)7,827,355국무총리 소속 피해조사 및 지원위원회 보고(2016). 위 값과 다름: 자료에 따라 다름
노무동원(중복 포함)7,534,429대백과. 국민징용 526,041, 관모집·관알선 7,008,388
병력동원(일본 정부 통계)209,279대백과가 인용한 일본 정부 통계
병력동원(학계 추정)약 40만기록 유실을 고려한 추정
군무원63,312피해조사 표 기준
국외 사망·행방불명약 27만대백과 집필자의 추정(최소치)
일본 내 현장 이탈 시도(1939~1942)257,907명일본 내무성 조사
일본군 ‘위안부’공식 통계 없음일본이 공식 통계를 공개하지 않아 피해 규모를 확정할 수 없다고 서술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선인 강제동원’ 항목에서 확인한 수치이며, 동원 연인원은 한 사람이 여러 번 동원된 경우를 중복해서 센 값입니다.

표의 숫자들은 서로 더하거나 비교할 수 있는 같은 종류가 아닙니다. 특히 ‘위안부’ 피해는 자료가 없어 규모를 숫자로 말할 수 없다는 점 자체가 기록의 한계를 보여 줍니다.

창씨개명 신고 현황

창씨개명은 1940년 2월 시행되었는데, 초기 신고는 매우 저조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창씨개명 거부운동’과 우리역사넷 『신편 한국사』 50권의 수치입니다. 1940년 2월 11일 시행 이후 집계입니다.
시점신고 비율출처
1940년 5월 중순(총호수 428만 700여 호 중)7.6%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40년 8월 10일 현재(호적 총수 대비)79.3%우리역사넷 『신편 한국사』 50권
최종(기한 연장 후)81.5%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위 수치와 다름: 자료에 따라 다름

출처: 두 자료 모두 조선총독부 집계에 바탕을 둔 것으로 보이나, 집계 시점과 기한 처리 설명이 서로 다릅니다.

저조한 초기 신고율 뒤에 높은 최종 비율이 나온 데는 행정 기구를 동원한 압박이 있었다는 점이 두 자료에서 함께 서술됩니다. 비율만으로 자발성을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숫자를 읽을 때 유의할 점

이 표의 숫자는 대부분 조선총독부와 일본 정부의 통계, 또는 그것을 바탕으로 한 후대 연구에서 나온 것입니다. 통치 주체가 자신의 정책 목적에 맞춰 만든 통계이므로 조사 범위와 정의가 한정되어 있고, 피해 당사자의 경험은 숫자에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같은 사안에 대해 자료마다 수치가 다른 경우가 있는데(국유지 면적, 동원 총계, 창씨개명 비율), 이는 집계 기준과 시점이 다르기 때문으로 보이며 어느 한쪽이 틀렸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추정치는 표에 ‘추정’이라고 표시했고, 확인하지 못한 수치는 싣지 않았습니다.

일부 수치는 2차 정리 자료나 서로 다른 집계에 기반하고 있어 원자료와 교차 확인을 진행 중입니다. 표의 ‘자료에 따라 다름’ 표시를 함께 확인하세요.

생각해 볼 질문

통치하는 쪽이 만든 통계에는 어떤 것이 잘 기록되고 어떤 것이 빠질까요?

쌀 생산량이 늘었는데도 1인당 소비량이 줄었다면, 이 숫자는 ‘성장’을 말하는 것일까요, ‘수탈’을 말하는 것일까요?

참고한 자료

아래 공개 자료를 대조해 작성했습니다. 자료마다 서술이 다른 부분은 ‘자료에 따라 다름’으로 표시했습니다. 오류를 발견하시면 오류제보로 알려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