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년 4월 1일 공포된 국가총동원법은 조선에도 적용되어 모집, 관알선, 징용 등의 방식으로 노동력과 병력 동원의 법적 근거가 되었습니다. 동원 규모는 집계 방식에 따라 수치가 다르게 제시됩니다.
- 언제
- 1938-04-01
전쟁이 법으로 사람을 부르다
전쟁에는 사람과 물자가 필요합니다. 일본은 이를 나라 전체에서 끌어모을 수 있도록 법을 만들었고, 그 법은 조선에도 적용되었습니다. 많은 조선인이 고향을 떠나 탄광, 공장, 전쟁터로 가게 된 배경에는 이 법이 있었습니다.
국가총동원법 공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일본은 1938년 4월 1일 국가총동원법을 공포했고 5월 5일에 시행했습니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전쟁이 이어지자 노동력 수요가 늘어난 것이 배경입니다. 이 법을 바탕으로 국민징용령, 국민근로보국협력령 등이 만들어져 조선에도 적용되었습니다. 즉 한 가지 법이 아니라 여러 법령이 겹쳐서 조선 사람들의 노동과 생활을 전쟁에 맞추어 묶어 두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그중에서도 사람을 동원한 부분을 중심으로 살펴봅니다.
모집, 관알선, 징용
노무 동원은 여러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먼저 관모집은 1938년 5월부터 시작되었는데, 조선총독부가 지역별로 인원을 정하면 행정기관이 사람들을 보내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모집이어도 완전히 자유로운 선택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점이 지적됩니다. 1939년 10월에는 국민징용령이 조선에 적용되기 시작했지만 처음에는 일부에만 적용되었습니다. 1942년 2월부터는 행정기관, 경찰, 조선노무협회 등이 협력하는 관알선이 시행되었고, 1944년에는 징용이 크게 확대되어 9월부터 일반징용이 실시되었습니다. 병력과 군무원으로 끌려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규모, 피해, 그리고 저항
대백과사전은 노무자, 군인, 군무원의 연인원을 약 780만 명으로 추계합니다. 같은 사전의 다른 항목은 노무동원 총인원을 최소 72만 4,900명 이상으로 쓰고 군인·군무원을 별도로 제시하는 등, 숫자는 집계 범위와 방식에 따라 다름입니다. 한반도 밖 동원지에서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된 사람은 약 27만 명으로 추산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습니다. 일본 내무성 조사에 따르면 1939년부터 1942년 사이 25만 명이 넘는 사람이 탈출을 시도했습니다. 국내에서도 동원을 피하거나 집단으로 거부한 사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광복 뒤에는 사할린에 약 4만 6천 명이 남겨졌다고 합니다.
생각해 볼 질문
1. ‘모집’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진 동원을 자발적이었다고 볼 수 있을까요? 판단하려면 어떤 기록이 필요할까요? 2. 동원 규모를 정확히 알기 어려운 이유는 무엇이며, 기록을 보존하고 공개하는 일은 왜 중요할까요?
참고한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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