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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식 — 파리강화회의 대표에서 통일운동까지

분위기를 표현한 AI 역사 재현 이미지입니다 (사료 아님)

김규식(1881~1950)은 동래 출신으로 1919년 파리강화회의 대표 활동, 임시정부 외무총장, 해방 후 좌우합작·남북협상 참여로 기록됩니다. 1989년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습니다.

언제
1881

한눈에 보기

김규식(호 우사)은 1881년 부산 동래에서 태어나 1950년 6·25전쟁 중 북한에서 사망했습니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영어 교육자로 활동하다 중국으로 망명해 외교와 임시정부 활동에 참여했고, 해방 후에는 통일정부 수립운동에 나섰습니다.

생애와 활동

1897년 미국에서 유학하고 프린스턴대학교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뒤 귀국해 YMCA와 여러 학교에서 교육 활동을 했습니다. 1913년 중국으로 망명했습니다. 1919년 신한청년당 대표로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되었고, 임시정부 외무총장에 선임되었습니다. 이후 구미위원부 활동으로 미국에서 외교와 공채 모금을 했습니다. 한국 문제는 강화회의에 정식 상정되지 못했습니다. 1920년대에는 극동피압박민족대회 참석, 국민대표회의 참여를 했고 1935년 전후 민족혁명당 창당에 관여했습니다. 1944년 임시정부 부주석에 선임되었습니다. 해방 후 반탁운동과 좌우합작 활동을 했고 민족자주연맹을 이끌었습니다. 1948년 남북연석회의 참석차 평양을 방문했습니다. 1950년 6·25전쟁 중 북한군에 끌려간 뒤 같은 해 12월 사망한 것으로 정리됩니다.

활동 지역

인명사전과 백과사전에서 확인되는 지역은 서울·부산, 일본 도쿄, 미국 워싱턴 D.C., 프랑스 파리, 중국 상하이·난징·톈진·쓰촨, 몽골 울란바토르, 러시아, 평양입니다.

기록이 말해 주는 것

공훈전자사료관과 인명사전은 1989년 대한민국장 추서를 기록합니다. 사망일은 인명사전이 1950년 12월 10일로 적고, 백과사전은 같은 해 12월 만포진 부근으로 서술해 자료에 따라 표기 정밀도가 다릅니다. 좌우합작과 남북협상은 평가가 갈리는 주제이므로, 참여 사실과 이에 대한 해석을 구분해서 읽어야 합니다. 백과사전은 1948년 남북협상이 성과 없이 끝났고 그가 5·10 총선거에는 참여하지 않았다고 서술합니다. 이 입장을 어떻게 평가할지는 연구자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관련 사료와 기록

  • 이달의 독립운동가 김규식 (식별번호 관리번호 2301) — 공훈전자사료관이 김규식의 1989년 대한민국장 서훈과 파리강화회의·외무총장 공적을 요약한 인물 페이지입니다.
  • 독립운동인명사전 김규식 — 독립기념관 인명사전이 김규식의 생몰년과 연도별 활동, 활동지역을 정리한 항목입니다.

생각해 볼 질문

1. 강화회의에서 문제가 정식 상정되지 못했는데도 외교 활동을 이어간 의미는 무엇일까요? 2. 해방 후 중도 노선에 대한 평가는 어떤 근거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을까요?

참고한 자료

아래 공개 자료를 대조해 작성했습니다. 자료마다 서술이 다른 부분은 ‘자료에 따라 다름’으로 표시했습니다. 오류를 발견하시면 오류제보로 알려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