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읽는 시간 약 3분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의 차이

분위기를 표현한 AI 역사 재현 이미지입니다 (사료 아님)

봉오동 전투(1920년 6월)와 청산리 전투(같은 해 10월)는 시기, 참여 부대, 전개 방식이 다르며, 날짜와 피해 수치는 자료마다 달라 출처별로 구분해 정리했습니다.

언제
1920-06
어디서
만주 간도 지역

봉오동 전투

대백과는 홍범도·최진동 연합 부대가 6월 4일 두만강 건너 일본군 헌병 국경초소(강양동)를 습격한 뒤, 6월 6~7일 교전을 거쳐 7일 봉오동에서 일본군 1개 대대를 포위해 격파했다고 서술한다. 우리역사넷의 한 서술은 대한독립군이 군무도독부군, 국민회군과 함께 싸웠다고 하나 전투 시기를 7월로 적어, 이 점은 대백과·독립기념관의 6월과 어긋난다. 지휘 체계도 자료에 따라 다르다. 대백과는 최진동 사령관, 홍범도 연대장 편제로 실제 작전은 홍범도가 주도했다고 하고, 독립기념관은 대한북로독군부군 홍범도 사령관을 중심으로 대한독립군·군무도독부·국민회군·신민단이 연합했다고 쓴다. 일본군 피해는 전사 157명(대백과는 부상 200여 명 추가)이 공통으로 나오고, 독립군은 대백과가 장교 1·병졸 3 전사, 독립기념관이 전사 4·부상 2로 적는다.

청산리 전투

우리역사넷은 봉오동 패전 뒤 일본이 여러 방면 부대를 동원해 동·서·남쪽에서 공격해 왔고, 김좌진의 북로군정서를 중심으로 한 연합 독립군이 6일간 10여 차례 전투에서 이를 격파했다고 설명한다. 독립기념관은 간도 화룡현에 집결한 독립군과 백운평으로 들어온 일본군 선봉대의 교전을 소개하며 북로군정서와 홍범도 부대가 연합했다고 쓴다. 일본군 피해는 우리역사넷이 3,300여 명 사살·부상으로 기술하지만, 독립기념관 글은 전체 수치를 제시하지 않으며 독립군 피해 수치도 확인되지 않는다.

두 전투의 차이

봉오동은 홍범도·최진동 계열 부대가 일본군 추격대를 계곡으로 유인해 하루 안팎의 교전으로 격파한 전투이고, 청산리는 여러 독립군 부대가 일본군의 다방면 공격에 맞서 며칠에 걸쳐 여러 곳에서 연이어 싸운 전투다.

이후의 영향

일본군은 이후 간도의 한인에게 보복했다(경신참변). 희생자 수는 자료마다 다르다. 대백과는 1920년 10월 9일~11월 5일 27일간 3,469명이라 하고 실제 피해는 더 컸을 것이라 덧붙이며, 독립기념관은 3,693명과 가옥 3,288채·학교 41개교·교회 16곳 소실을, 우리역사넷 표는 합계 약 3,106명을 제시한다. 독립군은 소만 국경 지대로 이동했고, 우리역사넷에 따르면 약 4,000명 규모의 주력이 밀산에 모여 서일을 총재로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했으며 이후 소련 영토로 옮겨 1921년 자유시에서 무장해제를 당했다.

참고한 자료

아래 공개 자료를 대조해 작성했습니다. 자료마다 서술이 다른 부분은 ‘자료에 따라 다름’으로 표시했습니다. 오류를 발견하시면 오류제보로 알려 주세요.